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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없이 걷던 빗속 거리

by boozada 2025.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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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없이 걷던 빗속 거리

비가 오는 날이면 늘 그 거리가 생각난다. 특별한 곳은 아니었다. 우산도 없이, 목적지도 없이,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걸었던 거리. 비는 조용히 내렸고, 사람도 적었다. 내 마음은 그 조용함에 스며들었고, 나는 오히려 그 시간의 고요함이 좋았다. 오늘은 우산 없이 걸었던, 그래서 더 기억에 남은 빗속의 거리들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비 오는 날의 거리엔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누구나 한 번쯤은 비 오는 날의 거리를 혼자 걸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보통은 우산을 챙기고, 비를 피하고, 최대한 젖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우산이 없었고, 굳이 사거나 쓰고 싶지도 않았다. 빗방울이 얼굴에 닿고 옷깃을 적셔도, 그 차가움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내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것 같았다. 거리는 생각보다 조용했고, 차도 드물게 지났다. 물웅덩이에 발을 잘못 디딜까 조심하며 걷는 사이, 자연스럽게 눈앞에 있는 풍경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됐다. 비에 젖은 가로수, 흐릿한 간판 불빛, 천천히 내려오는 빗줄기. 다 익숙한 도시의 장면들이었지만, 그날 따라 하나하나 새롭게 느껴졌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거리에는 여백이 생겼고, 나는 그 여백 속에 조용히 나를 풀어놓을 수 있었다. 평소엔 그냥 지나쳤을 창문, 그 안의 불빛, 젖은 나무 벤치조차도 의미 있어 보였다. 비가 모든 소음을 덮었고, 그 사이에 내 안의 복잡한 생각들도 정리되어 갔다. 그렇게 나는 우산 없이 걸은 그 빗속 거리를, 지금까지도 자주 떠올린다.

그날 걸었던, 서울 서촌의 빗속 풍경

서촌은 평소에도 조용한 편이지만, 비 오는 날의 서촌은 더욱 고요했다. 인왕산 자락 아래 골목들은 좁고 깊어서, 비가 오면 더 아늑하게 느껴진다. 한 손에는 종이컵에 담긴 따뜻한 커피, 다른 손은 주머니 속에 넣고, 천천히 걸었다. 우산을 들지 않으니 시야가 더 탁 트였다. 비는 조용히 골목을 적시고, 담벼락 아래를 따라 물이 흐른다. 작은 가게 간판 아래 서 있다가 다시 걷고, 습기 머금은 공기 속에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뭔가를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었다. 어느 가게 안에서 들려오는 재즈 음악, 비닐 천막 안에 앉아 있던 노부부, 그리고 내 어깨를 묵묵히 적시는 빗방울. 그 순간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온전히 나만의 풍경이었다. 그 고요함 속에 서 있던 시간이 참 따뜻했다. 서촌은 비 오는 날이 더 잘 어울리는 동네다. 그리고 그날처럼 우산 없이 걸어야 그 동네가 진짜로 보인다. 사람들이 없는 거리, 고요한 시간, 그리고 천천히 젖어가는 나 자신. 그날 나는 나와 가장 가까워졌던 것 같다.

제주도 골목, 장마 속 한산한 오후

제주 여행 중 우연히 비를 만났을 때였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숙소로 들어가거나 카페로 향했지만, 나는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구불구불한 돌담 사이, 파란 지붕의 집들이 이어지는 골목이었다. 그날따라 바람이 불지 않아서, 비는 수직으로 조용히 내렸다. 돌담에 빗방울이 톡톡 떨어지고, 골목 끝엔 개 짖는 소리 하나뿐이었다. 바닥은 젖어 반짝였고, 담 너머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감귤나무 잎들이 들려주는 소리가 마음을 쓰다듬었다. 제주의 풍경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비에 젖으면서 더 깊어졌다. 그곳엔 감정이 머무를 공간이 많았다. 무언가를 놓치고 가는 여행이 아니라, 마음을 천천히 내려두는 시간이었다. 비는 말을 아끼게 만들었고, 나는 그 시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걸을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제주 바다를 찾지만, 나는 그 빗속 골목이 더 기억에 남는다. 우산도 없이 젖어가며 걸었던 그 시간이, 어떤 명소보다 마음에 오래 남았다.

도쿄의 밤, 조용히 스며들던 거리

도쿄 여행 중 비가 내리던 밤, 긴자는 예상보다 조용했다. 네온사인은 흐릿하게 번지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모두 우산 아래 얼굴을 감췄다. 나만 맨몸으로 걷고 있었다. 관광지라기보다는 일상 같았고, 그래서 더 마음이 편했다. 불빛이 번지는 바닥, 가게 유리창에 맺힌 빗방울, 건물 사이를 타고 흐르는 물줄기. 그 모든 게 도시의 숨결처럼 느껴졌다. 비가 만들어내는 모든 소리는 마치 음악 같았고, 그 속에서 나 혼자 걸었다. 도시는 말을 걸지 않았고,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카메라도 꺼내지 않았다. 기록보다 기억이 더 중요한 순간들이 있다. 비는 흔적을 남기지 않지만, 그날의 감정은 확실하게 마음속에 남았다. 도시와 비, 그리고 나. 단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던 시간. 그날의 도쿄는 낮보다 밤, 맑은 날보다 비 오는 밤이 더 아름다웠다.

젖었지만, 가장 따뜻했던 풍경

우산 없이 걷는 빗속은 불편하고 번거롭다. 그런데 그 불편함이 마음의 경계를 낮춘다. 가려진 것들이 드러나고,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린다. 감정이 묻어날 틈이 생기고, 그 틈 사이로 나 자신이 스며든다. 비 오는 거리에서 혼자 걷는 일은 단순한 산책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을 꺼내어 조용히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우산을 쓰지 않았기에 가능했고, 고요한 거리였기에 가능했다. 서촌의 골목, 제주도의 돌담길, 도쿄의 밤거리. 모두 다른 곳이지만, 내겐 같은 의미의 장소로 남았다. 비는 멈췄고, 나도 돌아왔지만, 그날의 감정은 여전히 내 안에 머물러 있다. 언젠가 또 비가 오면, 우산 없이 그 거리를 다시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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