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모두 여행을 할 수 있지만, 이상하게도 가을에는 가을에만 갈 수 있는 곳들이 있다. 붉고 노랗게 물든 풍경, 조금은 쓸쓸한 바람, 따뜻한 햇살. 이 모든 것이 겹쳐지는 짧은 계절. 사람들 북적이지 않고, 혼자 또는 가까운 사람과 조용히 다녀오기 좋은 국내 여행지 세 곳을 소개한다. 가을이라는 계절이 선물처럼 느껴지는 장소들이다.
가을은 늘 너무 짧다. 그래서 더 깊이 머무르고 싶다
여행을 좋아한다. 하지만 사실 계절마다 꼭 어울리는 장소를 찾는 건 쉽지 않다. 여름은 어디든 덥고, 겨울은 눈이 오기 전까지 회색빛이 많다. 봄은 좋지만, 어딘가 정신이 없고. 그런데 가을은 다르다. 공기부터 다르다. 조금 차갑지만, 나쁘지 않은 온도. 햇살도 강하지 않지만, 충분히 따뜻하다. 무엇보다 바람이 좋다. 살짝 무거운 마음도 가볍게 밀어주는 그런 바람. 그래서인지, 가을엔 유독 멀리 떠나고 싶어진다. 하지만 현실은 여유롭지 않다. 회사도 있고, 약속도 있고, 막상 여행지를 정하려 해도 어디를 가야 할지 모르겠다. 그럴 때마다 꺼내보는 내 리스트가 있다. 사계절 중, 가을에만 제대로 ‘빛나는’ 조용한 장소들. 오늘은 그중 세 곳을 정리해 본다. 누군가에게도 이 계절을 더 따뜻하게 기억하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여행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가을이어서 더 특별한 조용한 국내 여행지 3곳
1. 강원도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
가을의 숲은 특별하다. 그중에서도 자작나무숲은 조금 더 섬세하다. 강원도 인제에 있는 원대리 자작나무숲은 10월 중순에서 11월 초까지가 가장 좋다. 잎이 다 지기 전, 은은하게 노란색으로 물든 자작나무들이 흰색 나무 기둥들과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든다. 이 길을 걷고 있으면, 자연이 사람을 감싸는 느낌이 든다. 걷는 길도 어렵지 않다. 편도 2km 정도 되는 숲길은 천천히 걸으면 40분 정도 소요된다. 사람이 몰리는 시기가 아니라면 거의 혼자 걷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중간중간 쉼터도 있고, 숨이 찰 일도 거의 없다. 무엇보다 사진을 안 찍고 그냥 걷고만 있어도 그 자체로 충분하다. 가을이 자작나무 사이로 흘러가는 느낌이랄까. 조용히 자신을 다시 마주하고 싶은 사람에게 이곳은 잠시 멈춰 서기 좋은 장소다.
2. 전남 구례 화엄사 옛길
사찰이라는 말만 들어도 마음이 차분해질 때가 있다. 특히 구례에 있는 화엄사 주변은 가을에 걸어야 제맛이 난다. 단풍이 붉게 내려앉는 이 길은 사람이 거의 없다. 단체 관광객이 다니는 길 말고 옆으로 조용히 이어지는 옛길을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바람 소리, 낙엽 밟는 소리만 들린다. 절의 울림이 느껴지는 길, 그 조용한 경내의 공기, 그리고 바람을 따라 흩어지는 단풍잎. 모든 게 말없이 마음을 가라앉히게 만든다. 가을 햇살은 짧다. 그래서 그런지 이 길을 걸을 땐 자꾸 하늘을 보게 된다. 빛이 다르게 내리는 걸 느끼고 나무 그림자가 길게 비친 길을 천천히 걷게 된다. 마음이 복잡한 날 다녀오면 꼭 누가 등을 두드려 준 듯한 느낌이 든다. 위로라는 게 꼭 말이 아니어도 된다는 걸 가르쳐준다.
3. 경북 예천 회룡포 전망대
강물이 마을을 감싸며 돌아 나가는 풍경. 경북 예천 회룡포는 그 자체로 감탄이 나오는 장소다. 하지만 여름과 겨울에는 너무 습하거나, 너무 쓸쓸하다. 가을이 가장 좋다. 이곳은 특히 이른 아침에 가야 한다. 안개가 살짝 낀 강물 위로 햇살이 퍼지는 순간을 보고 있으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 사진으로 다 담기지 않는 풍경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전망대까지 가는 길은 짧지만, 조금 가파르다. 그래도 그 끝에서 마주하는 풍경은 그 수고를 몇 배로 보상해 준다. 아무 말 없이 오래 보고만 있고 싶은 순간. 그런 장면이 이곳에서 자주 생긴다. 다녀온 사람들 대부분이 또 가고 싶다고 말하는 이유도 그거다. 가을이 아니면 이 감동은 반감된다. 바람, 빛, 공기, 색감 이 모든 게 조용히 겹쳐질 때 비로소 회룡포는 그 진가를 드러낸다.
가을은 스쳐가지만, 마음속엔 오래 남는다
가을은 늘 아쉽다. 금세 추워지고, 금세 어두워지고, 금세 지나가버린다. 그래서 오히려 더 깊이 담고 싶다. 그 찰나의 풍경을, 그 계절만이 가진 공기를, 내 안에 오래 남기고 싶어진다. 오늘 소개한 세 곳은 아주 화려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 소란스럽지 않고 잔잔하지만 깊다. 혹시 지금, 바쁘고 지친 일상 속에서 잠깐 숨 쉴 곳이 필요하다면 이번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이 중 한 곳쯤 다녀와도 좋을 것 같다. 가을은 눈으로 보는 것도 좋지만 마음으로 느껴야 더 오래 기억된다. 그 계절을 꼭 한 번, 내 마음 중심에 앉혀두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