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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잊고 싶어서 떠난 여행

by boozada 2025.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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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어서가아니라,잊고싶어서 떠난 여행

가끔은 뭔가를 보러 가는 게 아니라, 마음속 무언가를 잠시 내려두고 싶어서 떠나는 여행이 있다. 누군가는 그걸 도피라 말하지만, 나에게는 회복이었다. 오늘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잊고 싶어서 떠난 여행이 내게 어떤 시간을 주었는지 천천히 풀어보려 한다.

떠나야만 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어떤 날은 이유 없이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그날은 분명히 이유가 있었다. 관계가 끝났고, 그 끝이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시끄러웠다. 정리되지 않은 말들이 머릿속을 돌아다녔고, 뭔가를 하려고 해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사람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고, 익숙한 거리도 지치게 만들었다. 나는 그렇게 짐을 쌌다.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은 동해안 작은 마을이었다. 여행이라기보단 도망에 가까웠다. 하지만 누구에게 서가 아니라, 내 마음의 무게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보고 싶어서 떠나는 여행은 준비물이 있지만, 잊고 싶어서 떠나는 여행은 그저 짐을 덜어내는 과정이었다. 그 여행에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핸드폰도 잘 보지 않았고, 계획도 없었다. 그저 바다를 멍하니 바라봤고, 낯선 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누군가 나를 모르는 공간에서, 나도 나를 잠시 놓아보는 연습을 했다. 잊기 위한 여행은 그렇게 조용히 시작되었다.

모르는 동네, 익숙하지 않은 바람

버스에서 내려 처음 마주한 바닷바람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예상보다 한기가 도는 날씨였지만, 오히려 마음엔 더 잘 맞았다. 그 마을은 조용했다. 아침 일찍 문을 연 가게도 없고, 커피를 파는 곳조차 많지 않았다.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좋았다. 길가의 오래된 간판, 조용히 정리된 가정집들, 그리고 이름 모를 골목들. 그 안에서 나는 목적 없이 걸었다. 목적이 없다는 건 이상하게도 해방감을 준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진 게 없으니,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면 됐다. 낯선 동네는 나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왜 왔냐’ 고도 묻지 않았고, ‘무얼 할 거냐’는 시선도 없었다. 그 조용함 안에서, 나는 조금씩 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 잊고 싶다는 건, 지우는 게 아니라 그냥 덜어내는 거라는 걸 그때 알았다.

말없이 앉아 있었던 바닷가 벤치

그 마을의 작은 바닷가에는 낡은 벤치가 있었다. 누가 만들어 놓은지도 모르게 오래되어 있었고, 색도 많이 바랬다. 하지만 그 벤치가 그렇게 마음에 들 줄은 몰랐다. 바다를 정면으로 마주 볼 수 있는 자리. 파도 소리가 생각보다 가까이 들렸고, 바람도 일정하게 불었다. 나는 거기서 꽤 오래 앉아 있었다. 핸드폰을 꺼내지 않았고, 음악도 듣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지나고 보니 많은 감정이 머리 위를 스쳐갔다. 미련, 후회, 자책. 그러다 이내 아무 감정도 남지 않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게 아마도 내가 원했던 상태였던 것 같다. ‘잊는다’는 게 반드시 무언가를 지워야만 가능한 건 아니라는 걸, 그 벤치에 앉아 알게 되었다. 그냥 조용히 흘려보내는 시간. 그 시간이 필요했다.

돌아오는 길,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이틀 정도 머무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새로 만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버스 창밖을 보며 문득 깨달았다. 마음이 처음보다 조금 가벼워졌다는 걸. 여전히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현실은 똑같지만, 이상하게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행이 나에게 해준 건, ‘정리’가 아니라 ‘잠깐의 쉼’이었다. 사람들은 여행에서 무언가를 얻으려 한다. 나는 이번에 비워내고 왔다. 말을 줄이고, 생각을 줄이고, 의미를 붙이려는 노력도 줄였다. 잊고 싶어서 떠났지만, 결국 내가 다시 기억하게 된 건 나 자신이었다. 그 몇 시간의 정적 속에서 나는 나를 다시 마주했다. 아마 그래서 그 여행이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 같다.

때로는, 잊기 위해 떠나는 것도 필요하다

우리는 자주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려고만 한다. 보고 싶어서, 배우고 싶어서, 느끼고 싶어서. 하지만 어떤 날엔 그 반대 방향으로 떠나는 여행도 있다. 너무 많아진 감정들을 덜어내고 싶어서, 머릿속을 조금 정리하고 싶어서, 나를 멀리서 바라보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떠나는 여행도 아름답지만, 잊기 위해 떠나는 여행은 조금 더 조용하고 깊다. 이번 여행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안엔 충분한 위로가 있었다. 혹시 당신도 요즘 뭔가를 내려놓고 싶다면, 멀리든 가깝든, 잠깐 떠나보길 권한다. 당신이 무언가를 버릴 필요는 없지만, 조용히 흘려보낼 수는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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