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때때로 말보다 공간이 더 필요할 때가 있다. 누구와 함께도 아니고, 무언가를 하려고도 아닌, 그냥 가만히 있고 싶은 날. 그럴 때 나를 품어준 조용한 여행지들이 있다. 말 없이도 마음이 전해졌던 날들 , 그 시간의 충전의 되어준 세 곳을 이야기하려 한다.
침묵조차 편안했던 그 순간들
언젠가부터 나는 '말없이 있는 시간이 부족해졌다'는 걸 느끼게 됐다. 사람을 만나면 이유 없이 말을 해야 했고, 혼자 있는 시간엔 화면을 끼고 살았다. 그렇게 채워진 시간은 많은데, 어쩐지 마음은 늘 빈 것 같았다. 그래서 말 없이 앉아 있을 수 있는 공간을 찾기 시작했다.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지만, 아무 말 없이도 괜찮은 공간이 있다는 건 왠지 마음을 숨 쉴 수 있게 해주는 느낌이었다. 그럴 땐 복잡한 준비도 필요 없었다. 일정을 짜지도 않았고, 누구랑 갈지 고민하지도 않았다. 그냥 어느 날, 마음이 복잡한 아침, 버스나 기차를 타고 아무 말 없이 떠났다. 떠나는 이유가 뚜렷하지 않았던 날들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이유 없이 가볍고, 이상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건 그 공간이 나를 말없이 안아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내가 다녀왔던,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장소들. 지금 그 이야기들을 꺼내 보려 한다.
말 없이 앉아 있고 싶었던 날, 나를 품어준 세 곳
1. 강릉 안목해변 – 새벽 바다랑 바람의 위로
안목해변은 사람들이 흔히 커피거리로만 기억하지만 나는 그 바다 앞, 커피가 식는지도 모른 채 한참을 앉아 있었던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그날도 그랬다. 아무 말 없이 앉고 싶어서 아침 첫 기차를 타고 강릉으로 향했다. 특별한 일정도 없이, 그저 바다가 보고 싶었다. 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안목해변에 도착했을 땐 아직 가게들이 문도 열지 않은 시간이었다. 모래사장은 비어 있었고, 바람이 옷깃을 슬며시 흔들어댔다. 조용했다. 파도 소리만 귓가에 맴돌았고, 햇살은 아직 덜 깬 듯 어슴푸레했다. 그 바다 앞에서 나는 커피 한 잔을 손에 쥔 채 아무 말 없이 있었다. 누가 말 걸지도 않고, 무엇을 해야 할 이유도 없는 그 시간이 참 고마웠다. 그날 이후, 힘들 때마다 나는 안목해변을 떠올리곤 한다. 단지 그 조용함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2. 순천만 국가정원 – 바람 소리 마음을 달래주던 오후
누군가에게는 관광지일지 모르지만 나에게 순천만은 ‘생각 없이 걷는 곳’이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도착한 순천. 입장권을 끊고 정원으로 들어섰는데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햇살이 너무 부드러웠고, 바람은 잔잔했다. 주변엔 사람도 거의 없었고, 멀리 억새밭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작은 나무 의자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스마트폰도 꺼뒀고, 이어폰도 꽂지 않았다. 그저 바람이 얼굴을 쓰다듬는 걸 느끼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필요 없었다. 마치 자연이 먼저 다 알고 있다는 듯 그냥 조용히, 그렇게 나를 감싸주고 있었다. 마음이 엉켜 있을 땐 말보다는 바람이, 설명보다는 햇살이 더 큰 위로가 된다는 걸 그곳에서 처음 알았다.
3. 군산 은파호수공원 – 늦가을 오후, 나를 다독이던 풍경
군산엔 특별한 계획 없이 갔었다. 그저 ‘어딘가 조용한 곳’이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은파호수공원이라는 이름이 어쩐지 그럴듯했다. 공원은 생각보다 넓었고 사람은 거의 없었다. 걷다 보니 나무 사이 벤치 하나가 눈에 들어왔고 나는 그곳에 앉았다. 해가 기울어지는 늦가을 오후. 햇살은 금빛으로 퍼지고 있었고, 잔잔한 호수 위로 낙엽이 살짝 떠 있었다. 그 벤치에서 한 시간을 넘게 앉아 있었다. 음악도 없이, 책도 없이. 그냥 조용히 눈앞 풍경만 바라보며. 그날 나는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속 엉켜 있던 매듭 하나가 조금 느슨해지는 걸 느꼈다. 그 풍경이 내 안의 언어보다 더 많은 걸 말해줬다. 그래서 은파호수는 지금도 내게 가장 고요한 위로의 장소로 남아 있다.
말없이 있어도 내겐 이런 기억들의 더 오래 남는다
세 곳 모두,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무엇을 하겠다는 목적도 없었다. 그저 그곳에 있었을 뿐인데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고 생각이 정리되었다. 요즘은 ‘말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을 찾기가 어렵다. 늘 뭔가를 해야 하고, 소통해야 하고, 표현해야 하는 시대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괜찮은 장소가 참 귀하게 느껴진다. 오늘 이야기한 공간들은 내게 그런 의미였다. 위로를 말로 하지 않아도 공간이 먼저 나를 알아봐주는 느낌. 혹시 지금 당신도 말없이 앉고 싶은 날이 있다면 멀지 않은 곳으로 그냥 조용히 떠나보는 건 어떨까. 그곳에서 나 자신을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까.